책소개
1795년 간행된 어제본(御製本) ≪읍취헌 유고(挹翠軒遺稿)≫에서 원전에 실린 160편의 시문 가운데 시(詩)·부(賦)·기(記)·제문(祭文)·행장(行狀) 등 여러 형식의 글 66편을 정선해 원전의 순서대로 배열해 옮겼다.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는 조선 연산조의 시인 박은(朴誾)의 시문집으로 4권 2책, 목판본이다. 이 책이 처음 간행된 것은 박은이 갑자사화에 희생된 지 3년 뒤인 중종 3년(1507) 때로, 박은의 친구 이행(李荇)이 여러 친구들에게 흩어져 전해오던 것을 한데 모아 엮은 것이다.
전체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 1은 부(賦)·시(詩), 권 2∼3은 시(詩), 권 4는 기(記)·제문(祭文)·행장(行狀) 및 부록을 수록하였다. 이행이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읍취헌유고≫에 수록된 시는 교우들 사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일일이 수집해 정리한 것으로, 박은이 22세 때부터 26세까지 지은 불과 5년간의 작품이다. 현재 전하는 시가 대부분 교우와 관련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읍취헌유고≫ 소재의 작품을 유형별로 정리해 보면 화답시가 61수, 기행시 57수, 송별시 10수, 제시 3수, 기타 17수로 화답시, 기행시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기행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교우와 함께 어울리면서 지은 것이 교우들에게 보관되어 전해져 온 이유도 있겠지만, 박은 자신이 23세 때 파직된 후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그때마다 흥취를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시재로 일찍이 중국 사람들까지도 놀라게 하였다. 허균·신위·김만중·홍만종·이수광 등 여러 대가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박은은 조선 초기의 학소(學蘇) 일변도의 경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강서파(江西派)의 시풍을 수용하여 성공한 해동강서파의 맹주로 일컬어진다. 박은은 정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당조송격(唐調宋格)’이라는 독자적인 시풍을 모색하였다. 박은의 이 같은 시풍은 조선 초기의 송시풍(宋詩風)에서 중기에 이르러 당시풍(唐詩風)으로 변모하는 과도기에서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200자평
정조가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 극찬한 천재 시인 박은의 문집이다. 단 5년간의 작품 백여 수만으로도 그의 천재성을 가늠할 수 있다. 해동강서파로 불리며 조선 초기 송시파와 중기 당시파의 다리 역할을 한 읍취헌 박은의 글을 만나 보자.
지은이
박은(朴誾, 1479∼1504)은 조선 연산조의 시인이자 지사(志士)다. 본관은 고령,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읍취헌은 그가 서울 남산 기슭에 살았을 때 지은 당호(堂號)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4세에 독서할 줄 알았으며, 15세에는 문장에 능통했다.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申用漑)가 기특히 여겨 사위로 삼았다. 18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으며 홍문관에서 정자(正字)·수찬(修撰)을 지냈다. 20세에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23세에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이후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 경제적인 궁핍과 정치적 불안을 잊기 위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던 중 아내 신씨가 25세로 백일도 안 지난 막내아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 지제교(知製敎)로 부임하였으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갑자사화 때 연루되어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박은은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연산군은 더욱 분노하여 박은을 군기시 앞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효수(梟首)하였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죽은 지 3년이 지나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박은은 중국 강서파의 시풍을 수용하여 일가를 이뤘기에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맹주로 일컬어진다. 이행(李荇)·홍언충(洪彦忠)·정희량(鄭希亮)과 함께 연산조의 문장 4걸이라고도 칭한다. 친구 이행이 그의 시를 모아 펴낸 ≪읍취헌유고≫가 전한다.
옮긴이
처인재(處仁齋) 주인 홍순석은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다. 그것이 단국대,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지역문화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강남대 교수로 재임하면서부터다. 용인·포천·이천·안성 등 경기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30여 년을 보냈다. 본래 한국문학 전공자인데 향토사가, 전통문화 연구가로 더 알려져 있다. 연구 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출판부장, 인문과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을 역임했다. 그동안 ≪성현문학연구≫, ≪양사언문학연구≫, ≪박은시문학연구≫, ≪김세필의 생애와 시≫, ≪한국고전문학의 이해≫, ≪우리 전통문화의 만남≫, ≪이천의 옛노래≫ ≪용인학≫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번역서로 지만지 고전선집 가운데 ≪허백당집≫, ≪봉래 시집≫, ≪읍취헌 유고≫, ≪부휴자 담론≫ 등이 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 ≪탄 자와 걷는 자≫는 잡글을 모은 것이다.
차례
부(賦)
이백의 <석여춘부>를 차운하여 次李白惜餘春賦
사언고시(四言古詩)
지정에게 呈止亭
오언고시(五言古詩)
잠두봉에서 놀며 ‘제(霽)’ 자 운으로 遊蠶頭下占霽韻
흥양포에 배를 띄우고 泛興陽浦
사냥을 나가서 出獵
택지에게 화답을 청하며 投擇之乞和示
지정과 용재에게 贈止亭兼奉容齋
칠언고시(七言古詩)
장시를 지어 두 분에게 사의를 표하며 述長句致謝意於二君
차운하여 사화에게 드리며 次韻呈士華詞伯
지정과 함께 밤에 용재에 가서 자며 與止亭夜赴容齋宿
택지와 함께 사화의 북원에서 놀며 同擇之遊士華北園
동강에서 택지에게 東江書示擇之
벽탑 아래에서 마시며 飮甓塔下
갈산에서 자며 宿葛山
계축일에 배를 옮기며 癸丑移舟
배가 두미포에 이르자 질풍과 폭우를 만나 舟次豆彌遇疾風雨
달밤에 뚝섬을 내려가 압구정에서 자며 乘月下楮子島宿狎鷗亭下
벗이 시를 부쳤기로 그 운에 따라 화답하여 有寄依韻和答
칠언절구(七言絶句)
맑은 새벽에 우연히 조그만 시를 얻어 淸晨偶得小詩
오피궤를 용재에게 주며 以烏几遺容齋
오언율시(五言律詩)
계축일에 배를 옮기며 癸丑移舟
밤에 택지와 함께 흥천사에서 자며 夜與擇之 宿興天寺
영통사에서의 옛 시령에 따라 依靈通舊令
빗속에 감회가 있어 雨中感懷有作
빗속에 택지를 그리며 雨中有懷擇之
만리뢰 萬里瀨
홀로 앉아 있노라니 더욱 무료하게 되어 獨坐益使懷惡
어제 직경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회포를 적다 昨訪直卿還敍懷一律
새벽에 바라보며 曉望
택지에게 올리며 白擇之
비바람 가운데 홀로 누워서 獨臥風雨中
시를 읽어도 회포를 풀지 못하여 讀詩未能下懷
삼전도에서 자며 宿三田渡
용재 선생에게 올리며 白容齋先生
용재에서 국화를 대하여 택지와 함께 짓다 容齋對菊與擇之同賦
짧은 시로 서로를 위로하며 聊以短詩相問
눈을 대하자 근심스러운 감회가 갑자기 생겨 對雪憂感忽至
밤에 감회가 있어 용재에게 화답하며 夜坐感懷和容齋
칠언율시(七言律詩)
병든 눈으로 친구의 시운을 빌어 病眼次友人韻
택지에게 다시 화답하며 再和擇之
복령사 福靈寺
택지의 <영통사에서 놀며>라는 시를 생각하며 思擇之遊靈通詩
택지에게 보내어 아픈 가운데 웃도록 하다 寄擇之 發病中一笑
직경에게 贈直卿
택지의 시를 읊조리는 사이에 감회가 있어 화답하며 擇之詩 時時諷誦之餘 有感而和
거듭 화답하며 重和
밤에 누워서 이전에 보내온 ‘명(鳴)’ 자 운을 외다가 감회가 있어 화답하며 글을 써서 보내다 夜臥誦曾來鳴字韻詩
용재에게 바쳐 흥나게 하다 呈容齋發興
보령영 뒤의 정자에서 保寧營後亭子
홀로 앉아 긴 탄식을 하며 獨坐長歎
직경을 방문하고 訪直卿
밤에 누워서 사화를 그리워하며 夜臥有懷士華承旨
흥을 금할 수 없어 시를 지어 용재에게 부치며 情發不能自禁 因綴成章 奉寄容齋
연구(聯句)
우암을 지나다 흠뻑 마시고 過寓庵劇飮
택지에게 화답하며 和擇之
기(記)
김인로명행기 金仁老名行記
제문(祭文)
제김인로문 祭金仁老文
행장(行狀)
망실 고령 신씨 행장 亡室高靈申氏行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복령사
가람은 본시 신라의 옛 절로
천불은 모두 서축에서 모셔왔네
신인이 대외에서 길 잃었네만
지금의 복지 천태산 같아라.
봄날은 흐려 비 올 듯 새들 지저귀며
늙은 나무는 무정한데 바람 절로 슬퍼하네.
만사는 한번 웃음거리도 못 되나니
세월 흘러간 청산에 뜬 먼지뿐일레.
福靈寺
伽藍却是新羅舊
千佛皆從西竺來
終古神人迷大隗
至今福地似天台
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
萬事不堪供一笑
靑山閱世只浮埃
·택지에게 화답을 청하며
1
두보가 한평생 나그네 되어
호구하느라 천하 돌아다니며
모진 기한에 핍박되었어도
구학에서 건져줄 사람 없었네.
깊은 가을 장안에선
장마에 지붕 새어 걱정하고
공후의 문전엔 잡답도 하며
거마가 모여서 들끓는데
벗조차 찾아오지 않으니
내 집 누추함 알리로다.
외로운 자위자 그대는
나와는 십 년간 사귄 친구
궁항을 꺼리지 아니하고
술 들고 찾아준다면
깊은 시름 풀 만도 하리니
여남은 사람들 탓해서 무엇하랴.
投擇之乞和示
杜子老覊旅
糊口彌宇宙
平生飢寒迫
未見溝壑救
窮秋長安城
霖雨愁屋漏
公侯門雜沓
車馬所輻輳
故人尙不來
信覺吾居陋
踽踽子魏子
是我十年舊
不憚窮巷泥
載酒或相就
庶可解幽憂
餘子安足詬
·새벽에 바라보며
새벽에 바다에 뜬 별을 보나니
누각은 높아 추위가 스며들고
이 몸 밖의 천지 저리도 큰데
고각 소리 빈번히 들려오누나.
먼 산은 안개처럼 아득하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봄이 완연
어제 취한 술병 풀려 하거니
시흥만 부질없이 생기누나.
曉望
曉望星垂海
樓高寒襲人
乾坤身外大
鼓角坐來頻
遠峀看如霧
喧禽覺已春
宿酲應自解
詩興謾相因
·홀로 앉아 긴 탄식을 하며
우환이 내게만 주어졌건만
마음은 누구를 위해 관용하려는지
흩날리는 귀밑털 가을 기운을 띠고
쓸쓸한 비바람은 새벽 추위 더하네.
만사에 한껏 취함 마다 하랴
십 년 세월 후회됨은 벼슬 지낸 것
갑자기 호산 꿈 깨고 나니
티끌만 여전히 관에 쌓였네.
獨坐長歎
憂患秖應關己事
心懷尙欲爲誰寬
鬂毛颯颯生秋氣
風雨凄凄作曉寒
萬事可能辭爛醉
十年端悔做微官
遽然罷却湖山夢
依舊塵埃自滿冠